태극기와 성조기

지난해 겨울 미국에 들렀을 때 특별히 느낀 소감이 있다. 미국인들은 성조기를 몹시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극기를 어느 특별한 시기에, 특정한 지역에서 의례적으로 내세우는 데 비해 미국 사람들은 일상의 삶 속에 가까이 두고 있다.

내가 머물던 뉴욕 부루클린 게리슨비치 마을, 이곳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이집 저집에 성조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무슨 국경일쯤 되는 걸로 생각하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라고 한다.

평일에도 그들의 국기는 자랑스러운 아메리카의 상징으로 24시간 바깥 바람을 쐬며 나부끼고 있었다. 규모가 좀 크다 싶은 주택의 마당에는 우리나라 공공기관에서나 봄 직한 커다란 국기게양대가 세워져 있는 곳도 있다. 아마 설치비도 꽤 들었을 것이다.국기를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성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미합중국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다. 2001년 9월 11일, 5만 명의 상주인구를 수용하고 있는 110층짜리 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렸을 때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모여들었다. 그 견디기 어렵던 날 저마다의 손에는 예외 없이 성조기가 들려 있었다.

모국을 멀리하고 부모형제를 떠난 이민자들, 피와 땀으로 개척한 자랑스러운 나라. 3억의 미국인은 비록 인종이 다르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공통된 민족 정서가 없지만 미국은 자신들을 끝까지 돌봐 주고 책임지는 나라임을 믿으며 이에 항상 감사하고 자랑스러워한다.

온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미국의 성조기를 떠올리면서, 우리 태극기는 너무 괄시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있고 단일 민족임을 자랑하는 나라. 그러나 너무 가깝고 너무 친하고 너무 허물이 없어서일까. 나라의 상징을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마음 때문일까. 평시 우리의 국기는 관공서 깃대에나 걸려 있는 별무 관심의 존재다.

태극기는 8·15 광복된 날이나, 월드컵 축구경기의 열기가 달아오를 때 들고 나와 함성을 지르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내가 생을 부지하고 있는 나라,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겨레, 그들과 나는 하나가 돼야 한다는 동류의식과 공동운명체임을 확인시켜 주는 끈끈한 동아줄이요, 매개체다. 그렇게 해서 발동하는 힘이 바로 대한민국을 세계에 우뚝 서게 하는 원력이 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요즈음 국경일에 태극기가 많이 걸린다. 아파트 거주자 대표 회장이 관리소와 협력해 국기 게양을 독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거주자 대표가 예비역 장군이라는 점에서 더욱 뿌듯하다.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태극 음양의 조화 속에, 우주와 삼라만상이 그 안에 숨 쉬는 진리의 바탕 위에, 온 겨레가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하는 국가적 상징으로서의 국기. 우리는 태극기를 더 가까이에서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 일에 정성을 모아야 한다.

<정영휘 (예)육군준장·한국군사평론가협회 부회장 jyh33kr@yahoo.co.kr>

2008.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