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손기정 우승 보도)

 "손기정군? 여긴 조선일보요" 국내언론 사상 첫 국제전화 취재

경기 전날 통화에선 "고추장 먹고 힘내고 있다"

"마침내 우승은 했으나 웬일인지 울고만 싶소"

일장기 안보이는 사진 써

"손군이오? 여기는 조선일보사 동경지국인데 전조선이 한 가지로 듣고 싶어하는 손군의 이야기를 듣고자 전화를 걸었소."

"네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뭐 이렇게 먼 데서 전화까지 걸어주세요."

한국언론사상 최초의 국제전화를 통한 취재는 1936년 8월 8일 오후 5시30분 조선일보 동경지국장 김동진(金東進)과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마라톤선수 손기정(孫基禎)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경기를 하루 앞둔 손기정은 이날 통화에서 동포들의 기대에 전력을 다하겠으며 조선에서 보내준 고추장과 마늘장선(장아찌)을 먹고 힘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동경에서 베를린까지 3분 한 통화는 100원으로 기자 월급의 두 배였다. 손기정과의 통화가 '3통화 9분'이었으니 기자 월급의 6배가 들어간 셈이었다.

통화를 마친 김동진은 즉각 손기정과의 통화내용을 본사에 전화로 전달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화가 개통된 것은 그로부터 불과 3년 전인 1933년의 일이었다. 이날의 전화내용은 '朝鮮(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우리말의 國際電話(국제전화)/만리창공 타고온 孫君鬪志(손군투지)'라는 제목을 달고 8월 9일자 조선일보에 대서특필됐다.

▲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손기정과의 국제전화 통화 내용을 보도한 1936년 8 월 9일자 조선일보.‘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우리말의 국제전화’라는 제목이다. 마침내 9일 열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손기정이 1위, 남승룡(南昇龍)이 3위를 차지해 조선 남아(男兒)의 기상을 세계에 떨쳤다. 두 선수의 쾌거는 즉각 10일 아침 호외를 통해 전국에 전해졌다.

우승 다음 날인 10일 오후 6시50분 김동진은 다시 베를린과 전화를 연결했다. 전화 저쪽에서는 "네! 손기정입니다"라고 말한 후 한동안 아무 소리도 없다가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김동진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김동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쪽에서 감정을 수습한 손기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출전하기 전날 귀사(조선일보)에서 모처럼 전화를 걸어주셔서 고국의 정다운 우리 말 소리를 듣고 기어코 이겨야겠다는 결심이 백 배나 더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이겼다고 자꾸만 저를 높여준다니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웬일인지 설움만 더 나고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이날의 통화내용은 11일자 조선일보에 '世界制覇(세계제패)한 英雄(영웅)의 가슴도/뜨거운 興奮(흥분) 식자 쓸쓸한 哀愁(애수)/마침내 優勝(우승)은 했으나 웬일인지 울고만 싶소/電波(전파)에 흘러온 孫君(손군)의 第一聲(제일성)'이라는 제목을 달고 크게 보도됐다.

▲ 조선일보 1936년 8월 25일자에 실린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으로 결 승점에 들어오는 모습. 손기정의 유니폼에 달려 있는 일장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의 영웅' 손기정을 조명하는 기사들이 연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3대 민간지의 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이들 신문에도 고민이 있었다. 우승 사진을 써야 하는데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올라선 손기정의 오른쪽 가슴 아래에 있는 일장기(日章旗)가 문제였던 것이다.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8월 12일자 신문에서 손기정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웠다. 그러나 총독부가 알지 못했는지 아니면 작은 신문이라 눈을 감아주었는지 문제가 되지 않고 지나갔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8월 25일자 석간 2면에 사진을 실으면서 일장기를 말소하자 사정은 달랐다. 총독부는 8월 29일 동아일보를 무기정간 처분하고 화가·사회부장·편집기자·사진부장 등이 구속됐고 주필과 편집국장은 해임됐다. 정간 사태는 9개월 만에 풀렸다. 한편 동아일보 사태에 놀란 조선중앙일보는 체육기자로 하여금 자수케 하고 자진휴간에 들어간다. 이어 사장 여운형이 사임하고 결국 이듬해 11월 발행권 취소로 신문사의 문을 닫았다.

동아일보가 문제의 사진을 싣던 그날 조선일보도 손기정 사진을 3면 좌측상단에 크게 실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조선중앙일보나 동아일보와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손기정이 주경기장에 막 들어서는 모습의 사진으로 마침 손기정이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인 상태에서 왼쪽에 카메라 앵글을 맞춰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다. 우승의 감격을 전달하면서도 일장기를 노출시키지 않는 묘책인 셈이었다. 그 바람에 손기정 사진과 관련해서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탄압을 피해갈 수 있었다.

세계제패 두 달 후인 10월 19일 손기정은 남승룡과 함께 조선일보사를 방문했다. 조선일보 강당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조선일보사는 두 선수에게 상패를 수여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그 상패는 사실상 두 선수에게 국가가 수여하는 훈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 2010.1.29 이한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