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금속활자 본 찾아내 세계에 알린 병상의 노학자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프랑스에서 찾아내 세계에 알렸던 서지(書誌)학자 박병선(81)씨가 국내 병원에서 말기 암과 싸우고 있다. 박씨는 50년 넘게 프랑스에서 홀로 살며 한국 고문서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친 까닭에 입원비와 치료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금속활자 종주국으로서 문화적 자부심을 드높일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박씨 덕분이다. 박씨는 프랑스에서 역사학 등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67년 파리 국립도서관에 취직해 이 도서관 서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했다. 직지심체요절은 고려 백운화상이 불교 선(禪)의 요체를 깨닫게 하는 명구(名句)들을 모은 것을 제자들이 1377년 발간한 책이다. 박씨는 1972년 세계동양학자대회에서 직지심체요절이 1455년 출판된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선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해 국제적 공인을 받았다.

박씨는 1978년엔 파리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서고에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 298권도 찾아내고 1980년 파리 국립도서관을 그만둔 뒤에도 10년 동안 거의 매일 도서관을 찾아 298권의 목록을 작성하고 내용을 번역·해제(解題)했다. 그의 이런 집념이 국내에도 알려져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이 벌어졌고, 1993년 방한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영구임대 형식으로 한 권을 가져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국 정부 도움 하나 없이 프랑스 연금을 받아가며 외롭게 이 일을 해낸 박씨는 "좋아서 한 일일 뿐이지 지금 아무런 동정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1년만 더 살아 병인양요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짓는 것이 남은 꿈이라고 한다. 품위 있는 사회란 박씨처럼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일에 묵묵히 몰두해 온 사람을 알아볼 줄 알고 대접할 줄 아는 사회일 것이다. 조선일보 2009.11.5 A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