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실에서 인문(학) 진흥 관련 법률안 공청회가 열렸다. 국회에 계류돼 있는 '인문학 진흥 및 인문 강좌 등의 지원에 관한 법률안'(신계륜 의원 대표 발의), '인문사회과학진흥법안'(이명수 의원 대표 발의), '인문정신문화진흥법안'(김장실 의원 대표 발의)을 놓고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듣는 자리였다. 세 법안은 2013년 말에 제출됐는데 1년여가 지나서야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진 것이다.

이날 공청회에서 가장 큰 쟁점은 지금 필요한 것이 인문학 진흥이냐, 인문정신문화 진흥이냐 하는 것이었다. 신계륜 법안과 이명수 법안은 인문학의 학술적 연구와 후속 세대 양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김장실 법안은 인문정신문화의 대중적 확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 입장은 각 법안에 주무 부처로 돼 있는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의 힘겨루기가 더해져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다 두 입장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학계와 인문 활동가들이 가세하여 맞서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정하여 양자택일(兩者擇一)해야 할 것처럼 진행되는 이 논쟁은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인문학 진흥과 인문정신문화 진흥은 목표와 대상이 전혀 다르다. 전자는 대학 내의 인문학을 지원하는 것이고, 후자는 국민의 인문적 소양을 높이는 것이다. 당초 정부가 의도했던 것은 후자였다. 박근혜 정부는 4대 국정 기조의 하나로 '문화 융성'을 제시했고, 그 핵심 내용으로 '인문정신문화 진흥'을 꼽았다. 그런데 갑자기 인문학 진흥을 담은 법안들도 비슷한 시기에 제출되면서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연구재단 등이 맡고 있는 인문학 진흥은 이미 학술진흥법 등 법적 뒷받침을 받고 있다. 인문학 진흥을 강화할 필요가 있으면 그 테두리 안에서 지원액과 대상을 늘리면 된다. 반면 인문정신문화 진흥은 아직 법적·제도적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하다. 전국 곳곳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자생적인 시민 인문 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육성할 기반의 마련이 시급하다.

'인문정신문화 진흥'이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은 정부가 방향을 올바로 잡지 못하는 데도 있다. 많은 전문가가 제대로 된 인문정신문화 진흥을 위해서는 중앙에 미국의 국립인문재단(NEH) 같은 독립적인 전담 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는데도 지방에 담당 기관을 지정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인문정신문화 진흥의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인문진흥기금 설치에 대해서도 소극적이다. 인문 관련 시민 활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정도일 뿐 국민의 삶 구석구석에 인문의 향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원대하고 근본적인 틀을 적극적으로 마련하려는 포부가 안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8월 인문정신문화계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성숙한 선진국이 되고 국민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쉽게 접하고 인문적 자양분을 충분히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역경을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우리 국민이 이제 그 보답으로 선진국 국민처럼 정신적으로도 풍요롭고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게 만들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문정신문화 진흥'이 계속 표류하면 대통령의 약속이 지켜지기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