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만오순지경년 송축진연도’

　1901년 9월 7일 고종황제 50세 탄신 경축 연회가 경운궁(덕수궁)에서 치러졌다. 1896년 45세 때 모화관에서 열린 경축 행사에 불참했던 고종이 이날 행사에는 참석했다.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난 후 외세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때라 그랬던지 그날 행사는 화원에 의해 8폭 병풍에 고스란히 담겼다.

　‘고종황제 만오순지경년 송축진연도(高宗皇帝 滿五旬之慶年 頌祝進宴圖)’라는 제목이 붙은 이 병풍은 미국으로 반출됐다가 1997년 9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 등장했다. 당시 예상입찰가 80만 달러에 출품됐는데, 국내외 수장가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이유는 병풍이 대한제국 황제가 주최한 주요 행사를 다뤘으며, 마침 1997년이 대한제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 병풍과 같은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201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다시 등장해 84만2500 달러에 판매됐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 거래된 역사적인 유물이라는 사실 이외에 이 병풍은 또 다른 이유에서 우리에게 매우 소중하다. 바로 그림 속에 태극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사진①) 즉 8폭 병풍 중 일곱째 폭의 아래에 기수들이 큰 태극기를 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고종황제 50세 탄신 경축연회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돈을 써서 공들여 준비한 고종황제 50세 탄신 경축 연회는 병풍은 물론 의궤로도 남아 있다. 또한 영문잡지 ‘Korea Review’(한국평론) 1901년 9월 호의 기사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잡지는 9월 7일 오전에 개최된 경축연에 대한제국 주재 각국 공관 외교관들을 비롯한 많은 외국 손님이 초청됐으며, 이날 주목을 받은 프로그램은 대한제국 군악대의 연주였다고 보도했다. 또한 고종황제가 주요 참석자들에게 기념품을 증정했다고도 소개했다.

　“2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궁궐 안팎에서 화려하고도 성대하게 치러진 고종황제 탄신 경축 행사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여흥은 에케르트(Franz Eckert·1852~1916)가 지휘한 군악대의 연주였다.

　27명으로 구성된 군악대는 서양 악기를 단지 4개월 연습했을 뿐인데 놀랄 만한 수준의 연주 실력을 선보였다. 이들이 일궈낸 성과에 대한 찬사는 에케르트와 한국 음악가들이 함께 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지휘자는 맡겨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은 친밀하고도 충실하게 그를 따랐기 때문이다.

　말쑥한 제복, 번지르르 윤이 나는 악기, 부드러운 선율과 화음이 어우러진 이날 연주는 참석자들로부터 여러 차례 앙코르를 받았고,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런 식의 발전이라면 서울의 한국 군악대는 극동의 다른 악단과 경쟁해 능히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날 행사에서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 각국 외교관 등에게 기념 은장(銀章: 은메달, 사진②)이 수여됐다. 은장은 1000개가 제작됐는데 앞면에는 왕관이 새겨졌고, 뒷면에는 황제 탄신 50주년을 기념하는 은메달이라는 문구가 한글로 새겨졌다.”(‘Korea Review’, 1901년, 412쪽)

에케르트의 애국가

　‘Korea Review’의 편집자이자 위 기사를 쓴 헐버트는 이날 행사에서 연주된 곡목을 소개하지 않았다. 아리랑의 악보를 채보할 정도로 음악적인 재능이 있는 그가 연주 곡목을 기사화하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 그 때문에 혹자는 이날 대한제국 애국가가 최초로 연주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한제국 애국가는 그때가 아니라 1902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때 초연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이유는 고종황제의 시의(侍醫)였던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1869~1911)가 1901년 12월 27일 독일에 있는 그의 부모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 때문이다.

　“방금 1902년 1월 1일 대한제국의 황궁에서 개최되는 신년하례회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이 행사에서 구 프러시아의 지휘자인 에케르트가 새로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Neue Koreanische Hymne)가 황제 앞에서 연주될 것입니다. 에케르트는 발덴부르크 노이로데 출신으로 이곳으로 오기 전에 20년간 일본의 궁정악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리젠게비르게’ 혹은 ‘타게블라트’ 신문에 이 소식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신문은 기꺼이 기사로 다뤄줄 것으로 믿습니다.” (‘Richard Wunsch－Arzt in Ostasien’, 1976년, 89쪽)

　대한제국 관보 1901년 1월 27일 자에는 고종황제가 국가(國歌) 제정을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에케르트를 1901년 2월 대한제국 군악대 지휘자로 초빙한 것은 악단 지휘를 맡기는 것은 물론, 애국가 작곡을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본에 서양음악을 전수했고, 일본 국가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국가 악보와 태극기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신년하례회에서 성공적인 애국가 연주를 지휘한 에케르트의 건의에 따라 같은 해 7월 매우 호화롭게 장정된 악보 500부를 만들어서 50개국 정부에 발송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인쇄된 이 악보에는 민영환의 한문 서문을 비롯해 궁체로 쓴 한글 가사와 독일어 번역문, 그리고 음보(音譜)가 수록돼 있다.(사진③)

　‘大韓帝國愛國歌(Kaiserlich Koreanische Nationale Hymne)’라는 이 악보는 최초의 애국가 악보라는 의미 이외에도 국가 상징 연구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즉 악보 표지가 황실을 상징하는 깃발이나 자두꽃 문양이 아니라, 태극기와 무궁화 문양으로 장식됐다는 사실에서 대한제국의 국기가 태극기이며, 국화(國花)는 무궁화였음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 정부가 1902년 8월 애국가를 공식 반포하고, 동시에 국가(國歌)·깃발·문장(紋章) 등을 관장하는 기장조성소(旗章造成所)를 운영한 것을 보면 국가 상징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종황제는 군악대를 육성하고, 애국가 작곡의 공로를 인정해 에케르트의 계약 기간을 3년 연장해줬다. 참고로 에케르트는 1916년 타계할 때까지 우리나라에 살면서 서양음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잠들어 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