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頂上을 향해 뻗어 가는 길

"전쟁에서 한 번도 大勝한 적 없는 영국의 전략적 지혜변화 매달리는 조바심 변화 놓치는 게으름 함께 경계해야"

뉴질랜드 산악인 힐러리가 8848m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세계 최초로 발자국을 남긴 게 1953년이었다. 그해 이후 수많은 젊은이들이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길 곁에 목숨을 묻었다. 세계 최고봉이라지만 다른 봉우리와 높이 차이는 작으면 수십m, 커야 수백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거기 목숨을 거는 것일까. 정상을 향하던 마지막 뒷모습을 보여주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버린 어느 영국 청년은 "산이 거기 있어서"라고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희열, 그다음 밀려드는 내가 변했다는 느낌"이라고 한 사람도 있다. 세계 정상이란 그런 것이다. 오르는 길, 봉우리에 선 순간, 그리고 하산(下山)길에 각기 다른 깨달음과 만난다.

역사에는 세계 정상을 밟았던 여러 민족, 여러 국가가 남긴 흥망성쇠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오르는 길이 달랐던 이들은 내려오는 길도 저마다였다. 로마나 몽골처럼 작은 도시, 막막한 들판으로부터 세계로 뻗어나간 경우가 있는가 하면, 중국·러시아·미국같이 광대한 영토와 자원의 유산을 발판 삼아 뛰어오른 나라도 있다. 휘몰아치듯 밀려오더니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오로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나 발자취를 더듬어 봐야 하는 나라도 숱하다. 독일과 일본은 세계의 주변부에서 늦게 일어나 중심부로 밀고 들어서려다 세계대전을 일으켜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들까지 재앙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런 나라와 견줘 보면 영국은 '이상한 대국'이다. 영국 역사에는 압승, 대승, 속전속결의 전격적 승리 기록이 없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했다지만 그것도 어찌어찌하다 간신히 거둔 승리였다. 프러시아의 원병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도 전투의 승패가 바뀌었으리라는 말이 있다. 세계 1차대전, 세계 2차대전 역시 전쟁 초반 독일에 흠씬 얻어맞고 휘청거리며 밀리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를 뒤엎는 계기를 붙들었다. 비스마르크가 이끌던 독일처럼 단숨에 적국의 수도 파리로 진격해 들어가 남의 나라 왕궁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황제 즉위식을 올렸던 화려한 승리 기록은 눈 씻고 찾아도 찾기 힘들다. 영국은 처음에 무너질 정도로 얻어맞지만 않으면 마지막엔 승리를 움켜쥐었던 나라다. 반대로 상대국들은 영국을 초전에 박살내지 못하는 한 끝내는 패배로 몰리고 만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더 이상한 일은 지지 않아서 이겼던 나라 영국이 세계 정상에 머무른 기간이 가장 길었다는 사실이다. 나폴레옹전쟁 마무리를 위해 열린 1815년의 빈 국제회의 때부터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 100년 동안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섬나라 영국의 장수 비결은 역사의 수수께끼다.

대한민국은 지난해 세계 7위의 무역 대국, 세계 13위의 경제대국 자리로 올라섰다. 정상 아래 8부 능선의 상단부, 팔이 안으로 굽듯 점수를 후하게 주면 9부 능선의 하단부 근처다. 공연히 허세를 부릴 일도 아니지만 자기 비하의 옛 습관에 마냥 주저앉아 있을 것도 없다. 나라의 지도자 혹은 내일의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들도 이참에 영국의 수수께끼에 진지하게 도전해 볼 일이다.

물론 힌트도 있다. 영국은 정상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정상에 올라선 이후 나라 운명을 한 번도 지는 편에 걸었던 적이 없다. 동맹의 선택과 국제관계의 관리에 그만큼 슬기로웠다는 이야기다. 개인의 기회주의는 부도덕하다. 그러나 한 국가의 기회주의는 때로 국운 개척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세계 변화에 지나치게 초조해하는 조바심도, 벌써 출발해버린 기차를 뒤늦게 허겁지겁 뛰어 쫓아가는 지각생의 게으름도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다. 정시를 붙들어야 한다.

역사의 전환기마다 영국의 지혜로운 선택을 뒷받침한 것이 세계 변화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어 판단하던 영국 정치 엘리트들의 탁월한 정보 감각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변화를 앞서 읽던 영국의 정보 감각이 무뎌지면서 '영국의 세기'에도 황혼이 내렸다.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뜻을 헛짚고 1956년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저지하려 출병했다 군대를 되돌려야 했던 사건이 분수령이었다. 2011년 한국 지도부는 북한의 운명 그리고 세계사적 대전환기 속 국가 진로를 놓고 얼마나 멀리 내다보며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조선일보 강천석 20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