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없는 공정사회, ‘모래성’이다

공정사회가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등장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제시할 때만 해도 생기 없는 정치구호였으나, 총리·장관 후보자 낙마와 외교부 특채 파동이 겹치면서 실체를 가진 ‘뜨거운 감자’가 됐다. 국민들도 초미의 관심을 갖게 돼 거둬들일 수 없는 어젠다가 된 것이다. 왜일까.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 이유다.

과거 우리 사회는 가난과 비참한 삶으로 점철된 ‘헝그리(hungry) 사회’였다. 그 후 이 ‘헝그리 사회’는 멋지게 극복했으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불만이 가득한 ‘앵그리(angry) 사회’가 됐다. 삶은 과거에 비해 풍요로워졌지만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상태다. 이 ‘앵그리 사회’를 종식시키려면 경제성장이나 복지공여만으로는 부족하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정도로 정의가 제대로 서야 한다.

물론 ‘사촌이 땅을 산 걸 두고 배 아파한다’든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할 정도로’ 어이없는 질투를 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다독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루저’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해 한을 품게 되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제도와 절차, 관행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

공정성이란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대들보와 같은 중차대한 가치다. ‘짜지 않은 소금’을 소금이라고 할 수 없듯이 공정이 전제되지 않은 공동체는 더 이상 국가공동체가 아니다. 『신국론』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도 “정의가 없다면 국가도 강도 집단과 다를 바 없다”고 갈파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공정성의 실천에 앞서 그 원칙과 철학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공정사회는 단순 개념이 아니라 복합 개념이다. 그러기에 재화를 공평하게 나누자는 ‘공정분배’만 말해서는 안 되며 경쟁도 공정하게 하자는 ‘공정경쟁’도 같이 말해야 한다. 또 ‘패자부활전’의 필요성만 말할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겸손한 태도도 강조해야 한다. 승리만 받아들이고 패배에는 승복하지 않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의 기류가 지배적일 때 공정사회는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공정사회를 단번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선순위를 따질 필요가 있고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 당연히 공정사회는 ‘공정권력’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권력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행동하면서 국민들에게만 “옷을 입으라”고 지시할 수는 없다. 권력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공정은 사회 전체가 호흡해야 할 공동의 가치다.

그러나 공동의 가치로 만들기 위해서는 집권층의 자기 채찍질이 선행되어야 한다. 권력이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반성과 절제, 포용을 실천할 때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시민 개개인은 공정의 엄숙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은 스스로 자기를 태우면서 주변을 빛나게 하는 것이지, 자신은 그대로 둔 채 주변을 비출 수는 없다.

이처럼 공정성은 권력의 자기반성과 자기희생을 먼저 요구할 정도로 비장한 화두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공정이 국정과제로 제시되긴 했으나, 단추만 누르면 당장 나오는 커피자판기처럼 갑작스럽게 추진해서 결실을 낼 수 있는 어젠다는 아니라는 점이다.

『천일야화』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처럼 “열려라, 공정사회”라고 외치면 당장 공정사회가 눈앞에 펼쳐질 수 있겠는가. 후진하던 차가 즉시 전진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불공정 관행과 의식에 찌든 공동체에서 공정을 외친다고 하루아침에 공정사회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처럼 공정사회의 어젠다가 짧은 호흡보다 긴 호흡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라면 열매를 빨리 거두겠다는 조급한 심정보다는 씨앗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겠다는 느긋함이 필요하다.

땅이 기름지고 좋아야 씨앗이 잘 자라는 법이다. 그렇기에 교육, 특히 인성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성도덕교육을 통해 공정성에 대한 가치를 미래세대에 심어주는 것은 토양을 다지는 일이다. 씨앗이 메마른 땅이나 바위에 떨어지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듯이 공정의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으면 공정사회는 모래성이 된다.

이 점에서 교육과학부가 추진하고 있는 교육과정 개편은 유감이다. 국·영·수로 학교교육을 편중되게 만들고 도덕 과목을 위축시키는 식으로 인성교육을 경시하는 교육과정이 어떻게 공정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공정사회의 기초를 놓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있기나 한 건지 지켜볼 일이다.

<중앙일보 2010.916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