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일본해 병기(倂記), 국제적 확산

세계 지리학자들 "日本海 표기는 식민주의 산물… 지난 1000년간 東海였다" 유럽 언론·출판사도 동참 "알파벳順 'East Sea/Sea of Japan' 합리적"

'일본해(Sea of Japan)'를 고집해온 일본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그동안 일본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명칭은 일본해밖에 없다'는 논리로 '동해(East Sea)'와 '일본해'를 병기(倂記)하자는 한국측 제안을 일축해왔다. 하지만 네덜란드 덴하그(헤이그)에서 20~21일 열린 '제16회 바다 이름에 관한 국제 세미나'에 참석한 상당수 지리학자들은 '일본해' 단독 표기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각국 지도에 '동해'와 '일본해'가 병기되는 추세도 확산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 오스트리아 지명위원회가 각종 인쇄물과 영상물에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라는 지침을 제정한 것을 비롯해 불가리아, 터키, 내셔널지오그래픽 등도 이 같은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례들이 보고됐다.

주성재 동해연구회 부회장(경희대 교수)은 "동해와 일본해의 병기 비율은 2000년 2.8%에 불과했으나, 2007년에는 23.6%로 증가했다는 조사결과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산케이(産經)신문도 유럽의 주요 언론·출판사 및 박물관들이 '일본해' 단독 표기를 버리고 '동해'와 병기하는 쪽으로 흐름을 바꾸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세계적 지도제작사 '타임스 아틀라스'등 3개사가 일본해와 함께 동해를 병기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등 주요 신문들이 일본 측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고 있다. 산케이는 "일본의 재외공관들은 일본해로 단독 표기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으나, '두 가지를 병기하는 것이 안 된다면 표기 자체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미나에서 존 레니 쇼트(Short) 미 메릴랜드대 교수는 "국제수로기구가 처음으로 동해를 '일본해'로 규정한 1929년 당시 한국은 일본에 강점당한 상태라 발언권도 없었다"며 "동해가 일본해가 된 건 순전히 식민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쇼트 교수는 "미국이 '일본해' 표기를 받아들인 것은 일본이 만든 한국 지도를 그대로 썼기 때문"이라며 "종전과 동시에 소련과 냉전을 시작한 미국은 일본을 동맹으로 만들고 일본 자료에 의존하게 됐다"고 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해' 표기의 국제적 정당성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청룽(程龍) 베이징어문대학 교수는 "중국에선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를 1000년 가까이 '동해'로 지칭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나라의 학자이자 관료인 위원(魏源·1794~1857)이 펴낸 세계지리서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분석한 결과, 원나라(1260~1368)의 영역을 표시한 지도에서 '동해' 표기를 발견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세미나를 주최한 동해연구회의 박노형 회장(고려대 교수)은 "지난달 싱가포르에서 열린 IHO 실무그룹 회의에서 프랑스와 호주도 '동해'와 '일본해'의 병기 방안을 제안했다"며 "원칙적으로 병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뜻이라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이번 세미나에선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들도 개진됐다. 밀란 오로젠 아다미치(Adamic) 슬로베니아 학술원 교수는 "'일본해'를 먼저 쓰고 '동해'를 괄호 안에 넣을 경우 '동해'의 격이 '일본해'보다 떨어진다는 인상을 준다"며 "알파벳 순서로 'East Sea/Sea of Japan'으로 쓰는 게 합리적"이라고 했다.

동해연구회와 동북아역사재단이 공동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12개국 출신의 지명·지리학 전문가 30여명이 참가해 2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일본 학자 2명도 사상 처음으로 참석했다.(조선일보 2010.8.23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