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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문양의 원조를 하루 속히 복원돼야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12-06-02 05:13     조회 : 612    
  상세설명

태극문양의 원조를 하루 속히 복원돼야

감은사지는 문무왕의 마지막 호국사업으로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대종천과 동해가 만나는 동해구(東海口)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진국사(鎭國寺)'라 이름 지었는데, 왕은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687년 7월 1일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왕자 시절 수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아버지 태종무열왕과 함께 660년 백제의 항복을 받았고, 661년 왕위에 올라 668년 고구려의 항복을 받고 이후 7년간의 대당 전쟁을 승리로 이끈 통일의 주역이었다. 평생을 전쟁으로 보낸 문무왕의 일관된 호국의지는, 진국사의 창건으로 아들 신문왕에게로 이어졌다. 선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동해에 장례를 지내고, 선왕이 창건한 절을 이듬해 완성하고 이름을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아버지 문무왕은 평생을 받친 호국일념으로 절을 짓고 아들은 지극한 효심으로 절을 완성하였다.

 절의 구조 절은 남북으로 놓여 있는데, 입구 문을 남문이라고 부른다. 남문 앞에는 용담(龍潭)이라는 네모 난 연못이 있었다. 용담은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연못으로 생각된다. 바다물의 높이가 지금보다 높았으며, 용담의 물이 바다로 흘러들었다고 하니, 바다의 용이 물을 타고 용담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을 법 하다. 남문 다음에는 가파른 언덕을 올라 중문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는데, 계단은 복원하지 못하고 경사진 언덕으로 되어 있다. 중문에 서면 3층 쌍탑과 정면에 금당이 보인다. 중문 좌우로는 금당으로 가는 회랑(복도)터가 보이고, 금당 뒤에는 강당 터가 복원되어 있다.

 금당이란 주로 절터에서 사용하는 말로써, 금색인(金色人)을 모시는 집을 말하며, 금색인이란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경 봉암사에 금색전(金色殿)이라는 건물이 있다. 감은사지를 발굴할 때 가장 큰 관심은, [삼국유사]에 '동해에 용이 되신 문무왕께서 지친 몸을 편히 쉴 수 있도록 금당 동쪽에 용혈(龍穴)을 두었다.' 는 기록이 있다.
 발굴 결과 용혈은 남아 있지 않았으나 금당 바닥 밑에 빈 공간을 발견하였다. 이 공간이 바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었던 바, 용이 들어와 쉴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증명이 된 것이다.
  현재 금당의 모습은 1956년 복원된 것이다. 허물어진 계단과 금당 바닥에 깔았던 장대석과 주춧돌이 드러나 있고, 장대석 밑으로 빈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금당 계단 좌우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진 장대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태극은 도교(道敎)의 상징으로, 감은사는 불교를 바탕으로 화룡사상과 도교 등 나라를 지키는데 필요한 모든 사상이 포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서 삼층석탑 삼국시대 창건한 흥륜사, 황룡사, 기림사는 탑을 배치할 때 목탑을 기본으로 절의 중심부에 탑을 하나 배치하는 일탑식 가람이었으나, 삼국통일 후 석탑을 기본으로 두 개의 탑을 배치하는 쌍탑식(이탑식) 가람 배치로 변한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일탑식에서 쌍탑식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석탑의 발생은 삼국시대 분황사에서 전탑을 모방한 석탑인 모전석탑을 만들면서 시작이 되었던 것이 삼국시대 말에서 통일 초, 신라식 모전석탑과 목탑 모양으로 만든 석탑인 백제식 모목석탑 - 모목석탑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 의 두 형식이 하나로 합쳐져 새로운 형식의 한국식 석탑이 발생하게 되었다. 위의 탑들은 우리나라가 만들어 낸 독창적인 양식의 탑이다.

 국보 제112호인 동서 3층 석탑은 전체적인 형식에서 치수까지도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탑은 노반까지의 높이가 9,85m, 상륜부를 끼웠던 철제 기둥인 찰주의 높이 3,49m로 총 높이가13,34m 에 달한다. 682년 감은사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탑으로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거대한 규모의 석탑으로서 우리나라 석탑을 대표하는 귀중한 유적이다.
 각 석탑에 사용된 부재는 기단석 44점, 탑신석 13점, 옥개석 24점, 노반석 1점 등 총 82점의 석재가 사용되었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붕괴의 위험성이 높아 1960년 서탑, 1996년 동탑을 각각 해체 복원하였다. 동서탑 모두 3층 탑신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장엄구 서탑 3층 탑신 사리공에 청동제 사각함과 그 속에 담은 청동제 사리기가 발견되었다. 청동제 사각함 각 면 중앙에는 사천왕상을 하나씩 새겨 붙였고, 사리기 안에는 사리병이 들어 있다. 사리기와 함께 함속에 사리를 담을 때 사용했던 물건으로 짐작되는 집게(17cm)와 숟가락(12cm)이 들어 있었다. 동탑 3층 탑신 사리공에서는 54과의 사리가 봉안된 금동제 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탑을 복원하면서 재봉안하였다.

<글 두나> 토함산을 넘어 대종천을 따라 동해로 가는 길. 바다가 가까워지면 신작로 왼쪽편에 우뚝 솟은 2기의 3층석탑이 보인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일생을 보낸 문무왕이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터를 닦고 그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682년에 완성한 절이다. 왜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고자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으나, 절이 완성되기 전에 문무왕이 죽는다.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되겠다" 고한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대왕암에 안장했다.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1979년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절의 구조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문-쌍탑-금당-강당 순으로 되어 있는 쌍탑일금당 양식으로 최초의 것이다.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회랑이 있다. 금당의 동쪽과 서쪽에 회랑(익랑)이 연결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금당의 바닥은 H자형의 받침돌을 놓고 긴 돌로 마치 돌마루를 얹어 놓은 것 같이 만들고, 그 위에 기초를 두고 건물을 세웠던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돌마루 밑의 빈 공간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 금당에서 몸을 쉴 수 있도록 한 상징적인 것이다. 이는『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남쪽 언덕 아래에는 작은 연못(용연)이 있고 신라시대 쌓은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당시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감은사가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것은 높이 13미터의 동서3층석탑이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의 넘쳐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신문왕이 쌓았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1970년 발굴로 건물지를 추정하였으며, 1979년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이견정을 새로 지었습니다.(포시즌유스호텔 문화유적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