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국가상징물연구소

성낙인/서울대 법대 교수·헌법학

‘휘날리는 태극기는 우리들의 표상이다∼’. 온 국민이 즐겨 부르는 군가의 한 구절이다. 왜 태극기(太極旗)는 우리들의 표상인가.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동일성을 상징하는 징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국기·국가·국어가 전형적인 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기인 태극기, 국가인 애국가, 국어인 한글은 옳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나라의 기본법이자 최고법인 헌법은 고사하고 법률에서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해 왔다. 한국어, 즉 한글은 2005년에 국어기본법의 제정으로 비로소 법적으로 우리말이 되었다. 태극기는 2007년에 제정된 국기법 덕분에 우리의 깃발이 됐다. 그 전에는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휘날려도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애국가(愛國歌)는 아직도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2010년에 대통령훈령으로 제정된 국민의례 규정에서 ‘애국가 제창: 1절부터 4절까지 모두 제창하거나 1절만 제창’이 유일한 법적 근거다. 그러니 진보정당의 공식 행사에서 애국가 대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도 위법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는 국가 정체성(正體性)을 법적으로 정립하는 데 소홀했다. 다만, ‘님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해 기념식 공식곡으로 연주하는 것은 별개다. 각종 기념식에는 애국가 제창에 이어 해당 기념곡 연주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태극기와 애국가가 국가의 상징이라면 제복(制服)은 국가가 부여한 수호신의 표지다. 공직자 중에서 유독 군인·경찰·소방관은 전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제복을 착용한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책임지는 최일선에 서 있다.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했을 때 꽃다운 젊은이들이 제복 속에 청춘을 불사른 덕분에 오늘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구가한다. 국가와 국민은 그들의 영혼을 영원토록 기려야 할 책무가 있다. 서해의 찬 바다에 격침된 천안함 영령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최근 공개된 ‘천안함 프로젝트’는 그 적실성을 의심케 한다. 아무리 영화라는 특수한 장르라 하지만 아직 동 시대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그와 같은 주제 설정은 좀 더 신중해야 했다.

지난 5월 3일 부산 ‘동의대 사태’ 24주년에 즈음해 희생된 경찰관의 부조 제막식이 있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그때 시위자들은 이미 2002년에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때 희생된 경찰관들은 2010년에 뒤늦게 제정된 ‘동의대 사건 등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정권을 달리하며 그 역사적 평가 또한 달리했던 결과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사회공공의 안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경찰관들의 희생은 애써 외면하고 시위만이 정당화되던 민주화 과정의 서글픈 단면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동의대 사태는 시위자나 경찰관이나 다 같이 시대의 희생자였다. 이제는 희생자들 사이에 용서와 화해의 장이 마련돼야 할 때다.

지금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계속되고 있는 쌍용차 해고 근로자의 시위는 민주화의 불꽃을 일구던 동의대 사태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대한문 앞의 시위는 해고 근로자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생존의 장(場) 마련만이 시위의 종결에 이르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정부와 지자체 모두가 담 너머 불구경하듯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낭만적인 수사(修辭)로 안주한다. 그 와중에 시위대를 제지하는 애꿎은 제복의 경찰관들만 온갖 비난을 뒤집어쓴다.

세종로를 에워싼 경찰차와 시위대를 지척에 두고 도열해 있는 앳된 제복의 남녀 경찰관들은 다 같이 우리의 소중한 아들딸이다. 더 이상 해고 근로자와 젊은 제복이 맞닥뜨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생존을 위한 투쟁 장소의 제공보다는 생존의 터전 마련이 더 절실하다. 이 시간에도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소외된 이웃의 절박한 생존권 투쟁을 국가와 사회가 보듬고 안아줘야 그게 진정한 경제민주화이고, 그게 바로 사회복지 국가의 구현이다. 그래야만 경찰관의 공권력 행사는 적법성과 정당성을 담보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민주법치국가임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문화일보 2013.5.7
성낙인/서울대 법대 교수·헌법학)